할머니 디자이너, 할아버지 개발자

얼마 전에 같이 일하는 동료들과 “만약 선택을 할 수 있다면 어떻게 늙어가는 편이 좋겠어?” 하는 질문을 서로 던지면서 수다를 떤 적이 있는데, 아주 재미있더군요. 아무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저희 셋(기획자, 디자이너, 개발자)은 모두 필드 체질이었습니다. 나이를 아무리 먹어도 개발자는 손수 코딩을 하겠다는 것이고, 디자이너는 디자인 툴을 손에서 놓고 싶지 않다는 거죠. 마우스 잡을 힘이 남아있는 한 지금 하고 있는 일을 계속하며 살겠다니, 음.. 무슨 방망이 깎는 노인처럼 장인정신 비슷한, 그런 건가? 각자의 노년에 대한 상상들을 듣고 있자니 우리가 낭만에 빠져도 제대로 빠져버린 것인가 싶었지만, 요즘 세상 돌아가는 모습을 보니 어쩌면 그것이 낭만이 아닌 현실적인 선택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2014-04-15-HelenThomasAndBarackObama2009.jpg [사진] 여기자 헬렌 토머스와 버락 오바마 대통령. 백악관 출입기자로 50여년간 활동하며 J.F.케네디부터 버락 오바마까지 10명의 미국 대통령을 취재했습니다. 2013년 7월 20일에 92세의 나이로 별세하셨어요. 좀 어두운 이야기부터 하자면, 지금의 삼십대는 2040년에 오십대 중반에서 육십대 초반에 걸쳐있게 되는데, 이때 우리나라 국민의 예상 평균수명이 약 90세입니다. 일반적인 기업에 계신 분들이라면 오십대 중반부터 육십대가 되기 전에 대부분 퇴직을 할 것이고, 한편 그 이후로도 갈수록 평균수명이 늘어날 것을 예상하면 어림잡아 퇴직 후 35~40년을 더 사는 것입니다. 후덜덜하죠. 삼십대 중반인 제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살아온 만큼을 퇴직 후에 더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무엇으로 그 긴 세월을..? 저도 제 동료들도 앞일을 사서 걱정하기보다는 현재에 가급적 충실하자는 입장인데, 지금 저희 회사 동료들을 포함한 또래 세대가 지금 처한 상황들을 놓고 다가올 미래를 떠올려보면, 이건 정말 한 잔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현재 시점에서 상상해 볼 수 있는 미래의 모습은 희망보다는 공포 쪽에 더 가까운 것이 분명해요. 내 손목이 마우스의 무게를 감당해주는 한 끝까지 일하고 싶다는 개발자 친구의 말이 낭만이 아닌 현실로 다가오는 것은 아마도 그런 공포가 제 안에도 있기 때문이겠죠. 직접 내 손으로 최종적인 성과를 만들어내는, 그 현장의 감각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그 다음’이 불안해지리라는 확신 같은 것들. 2014-04-15-massimovignelli.jpeg [사진] 이탈리아의 렐라 비넬리(Lella Vignelli), 마시모 비넬리(Massimo Vignelli) 부부. 두 사람 모두 청년 시절부터 활동해 온 디자이너로, 헬베티카(helvetica)체를 미국에 처음 소개하여 큰 반향을 얻었습니다. 2012년에는 이들의 삶을 다룬 ‘Design is One’이라는 다큐멘터리가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현장에 있고 싶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단지 생존의 문제 하나 때문만은 아닙니다. 개인적인 취향이기도 합니다만, 저는 나이를 먹어도 실무를 손에서 놓지 않는 것이 관리자로서 성장하는 것보다 더 멋진 것이고, 그것이 제가 추구하는 행복한 삶에 더 기여하리라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물론 그에 따른 직급이나 보수의 차원까지 들어가면 이야기가 좀 복잡해질 수는 있겠습니다만.) 물론 크든 작든 조직을 운영하고 사람을 챙기는 것 또한 대단히 매력적이고 가치있는 일이죠. 저도 지난 몇 년 간 조직 안에서 그러한 역할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 포지션이었기 때문에 비로소 가능했던 경험들이 있었고, 비록 그것이 지금 제가 추구하는 상과는 다르지만 당시에 그러한 방향으로 커리어를 쌓아나간다는 것이 저에게 있어 굉장한 유혹이었던 기억이 납니다. 2014-04-15-arisongwook.png 미래의 호호할머니 디자이너(왼쪽)와 코드 짜는 노인(오른쪽) 경험이 쌓이고 직급이 올라 점점 더 많은 사람과 더 큰 조직을 운영하고, 그렇게 더 큰 흐름을 만들어나가는 것을 추구하는 일도 분명 가치 있지만, 아무래도 우리는 호호백발의 할머니 디자이너와 할아버지 개발자로 늙어가는 편이 더 멋진 인생이라고 생각합니다. 개발자도 디자이너도 아닌 저는 여전히 어딘가에서 제안서를 쓰는 백발의 기획자로(그때까지 머리가 남아있다면).. 그런데, 사회 제도나 노동 문화가 잘 잡혀 있으면 우리가 이런 고민 안 하고 놀 궁리만 하는 백발의 친구들로 늙어갈 수 있을 테고 그것도 나름 멋진 노년 아닐까요. 이렇게 최대한 오랫동안 일할 구상을 하고 있자니 좀 서글퍼지긴 하네요. 아무튼 당분간은 오래 오래 일하며 같이 늙어갈 수 있기를 바라 보기로 합니다.

http://www.huffingtonpost.kr/hanseong-kim/story_b_5151103.html?utm_hp_ref=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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